황모🐋HwangMo retweeted
Replying to @HwangMo777
사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돌프 티에르부터가 오를레앙파였다는게 아이러니죠.. 단지 그 시점에서, 모두가 최소한 납득 가능했던 정체가 공화정이었을 뿐.
자료조사와 정리에는 ai 적극활용하는데, 글 쓰는 것자체는 언제나 온전히 내가 함. 이 때 장점이, 그게 유용한가는 차치하고, 내가 생체-계산기 써서 써놓은 글을 다시 기계에게 먹이고 평가 받아볼 때 느껴지는 딸딸이적 쾌감이 있음.
교과서에도 나왔던, 조선 개화기 때 유행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에도 이 가리발디의 인생여정이 소개됨.
근데 재밌는건, [이태리 건국 삼걸전]자체는 량지차오가 이태리 통일을 다룬 일본 책들을 한 권으로 편집한 것. 그리고 이것을 다시 신채호가 번역했음.
근데 메이지 일본에서 저 이태리 통일과정에 대한 서술은, 당시 영국 출판시장에서 인기 주제였던 이태리 통일에 대한 책들을 번역한 것들이 많았음.
그런데, 이 영어에서 일본어로의 번역 과정 중에, 가리발디가 가지고 있던 공화주의, 특히 좌파적 요소는 많이 탈락됨. 오히려 그는 “존왕양이”의 기치 하에서 이전의 갈등은 덮어두고 죠슈와 연합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스러운 인물로 묘사됨.
사실 이 이태리 리소르지멘토에 대한 메이지적 해석(혹은 왜곡)이 이후 소위 “천황제 파시즘”으로(물론 용어자체가 이미 일본 전후 좌파 시선이어서 난 좀 답정너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어지는 한 조류라는 해석도
그리고 요즘 스터디에서 이태리 전간기 하시는 분 말을 많이 들어서 더 그 연결이 강화되었는데, 19세기 공화주의 혁명 모먼트의 지도자들은 의외로 전통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거나 스스로가 전통주의자임.
이 사례로 비스마르크가 종종 제시되고, 사실 그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3세도 그런 맥락이 있음. 근데 요즘 더 관심이 가는 것이 가리발디.
스스로는 공화주의자였는데, 이태리 통일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의 우선성을 냉정히 판단하여 사보이 국왕 엠마누엘레와 카보우르에게 협력.
혁명 참여 와중에 이태리 군주들과 지방정부들의 견제를 받아 십 년 넘게 망명 생활을 하는데, 이 때 남미, 특히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공화주의 혁명(내전)에 참전함. 사실 우루과이 헌법에는 아예 지대한 영향을 미침. 그리고 이렇게 성공을 맛본 뒤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서 통일전쟁을 지휘. 그래서 붙는 별명이 “두 세계의 영웅”.
흥미로운 건, 이 가리발디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것. 사실 그가 남미에서 망명생활할 때 저 프리메이슨 롯지를 전전하며 생활함. 그리고 이태리 통일 이후엔 이태리 프리메이슨 최고직인 그랜드 마스터를 역임함.(이 때 베네치아 합병 문제로 완전한 통일은 아니긴 했음.)
근데, 말년에는 이태리 통일 의회 의원직을 수행하는데, 이 때 또 사회주의(막시즘과는 다른 종류의, 마르크스 이전 사회주의. 마르크스가 공상적이라고 비난했던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 조류들)에 긍정적 의견을 표하고 그들과 연대할 것을 요청. 사실 그는 줄곧 생시몽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음. 당연히 생산수단의 국가/노동자의 소유는 반대했지만,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진보적 “좌파“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음.
그는 파리코뮌이 발생했을 때도 살아 있었고, 파리코뮌이 발생하는 배경인 보불전쟁 때에도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는데, 파리코뮌을 박살내고 프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학살을 진행한 프랑스 정규군 소속이었지만(그는 파리에는 참여하진 않음. 파리코뮌 당시에는 그가 속했던 외국인 용병대는 해산한 상태), 파리코뮌에 동정적이었고, 아예 제 1인터네셔널은 지지함.
사실 가리발디는 굳이굳이 프레이밍하자면 전통적 군주제와 타협할 수 있는 혁명적 공화주의자에 가깝고, 이 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 좌파(당연히 용법은 20세기와 다름)“로 정의. 사실 오히려 그는 저 전통주의자의 “근대적 성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
[듄] 주제 의식: 적당히 강한 남자들은 카르텔을 만들고, 보추는 제국을 만든다
이거랑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부친살해=성장이라는 단순한 도식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듄]임.
전반부 주인공이자 드니빌뇌브 영화의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데스는 아버지 레토 공작과 갈등하거나 그를 살해함으로써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는 사람이 아님.
폴에게 아버지 레토는 오히려 닮고 싶은 모범인 동시에, 어머니 제시카 만큼의 유대와 이해가 동반되진 않은 다소 감정적 거리가 있는 인물.
하지만 적대적 가문이었던 하코넨에 의해 레토가 살해당하고 가문이 몰락하며, 폴은 아버지의 복수라는 명분을 획득함.
하지만, 그 복수에 레토에 대한 감정적 유대는 일반적인 아버지의 복수에서 나오는 유대와 다름. 애초에 폴은 베네 제세릭트(마녀)인 어머니의 기획으로 태어난 이이기 때문. 무엇보다, 그가 집단들의 기획과 약물로 일종의 메시아인 리산알가입이 되며, 이미 아버지가 제공해주는 도전인 형이상학적, 윤리적 권위에 대한 고민은 이미 아버지 레토의 수준을 뛰어 넘음.
미묘한 것이, 폴은 그 “부친 살해”라는 의례를 (자신은) 의도치 않게 우회했고, 그것을 우회했으나 오히려 더 큰 “아버지로서의 권위(=혁명군과 제국을 이끄는 “아버지”)”를 얻고 그것에 고통받음. 차라리 아버지의 것을 욕망하며 부친 살해하고 적당히 강력한 남자가 되었으면 겪지 않았을 고통.
근데, 이미 폴의 어머니인 제시카에게 레토는 애정의 대상이긴 했지만, 아들이 질투하는 독점적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단 오히려 아들를 태어나게 하기 위한 장기말, 혹은 종마에 가까웠음. 제시카의 독점욕은 레토에게보단 원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을, 하지만 자신의 욕망으로 메시아적 사명을 띤 아들로 태어나게 한 폴을 향함. 사실 폴은 이미 어머니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 그는 아버지의 것을 욕망해야할 이유가 없었고, 바로 그 질투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 아버지는 그냥 삼촌과 다를 바가 없음.
그런데… 비단 19세기적 서구의 정신분석에서 벗어난 지역 뿐만 아니라, 서구 내부에서도 아버지가 온전한 질투의 대상이자 아들이 갖지 못한 형이상학적 질서의 소유자인 경우는 드뭄. 사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도 부친 살해는 아들에게 성장의 매개가 되는 경우는 드뭄.
러시아어로 써져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데, “조상 시뮬레이션”에서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가가 죽은 모든 인간 정신의 부활”을 요청한 러시아 코스미즘의 향기가 물씬 남.
글고 역시나 러시아 코스미즘은 정교회 신비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도 뭔가뭔가
Гипотеза, что воспринимаемая реальность может быть искусственной симуляцией, давно вышла за пределы фантастики.
Ник Бостром в 2003 году сформулировал её как строгий аргумент-трилемму: либо почти все цивилизации вымирают, не достигнув уровня запуска высококачественных «симуляций предков»; либо почти никто из достигших такого уровня этим не занимается; либо мы почти наверняка живём внутри одной из таких симуляций. Аргумент не доказывает симуляцию, но показывает, что хотя бы одно из трёх утверждений истинно. Это делает тему предметом рационального анализа, а не праздного фантазирования.
Если всё это симуляция, становятся ли наши переживания и чувства «ненастоящими»? Функционализм в философии сознания говорит, нет. Ментальные состояния определяются не субстратом, а тем, какую причинно-следственную роль они играют в системе. Если структура обработки информации, причинно-следственные связи и интеграция сигналов реализуются правильно (в биологическом, кремниевом или чисто вычислительном «мозге»), соответствующие переживания возникают. Боль остаётся болью, потому что она ощущается как боль тем, кто её испытывает. Радость, страх, любопытство и ощущение собственного существования определяются внутренней организацией процессов, а не материалом.
Декарт сформулировал единственную несомненную вещь: «я мыслю, следовательно, существую». Даже если весь мир вокруг — вычисление, сам факт переживания мышления и чувств не становится иллюзией. Сон тоже «симулирует» переживания, и внутри сна боль или радость реальны для спящего. В полноценной симуляции, где нет внешнего «пробуждения», переживания остаются единственной доступной реальностью. Отрицать их подлинность означало бы утверждать, что только биологический углерод может порождать квалиа, а любой другой носитель той же функциональной организации — нет.
Второй вопрос касается тех, кто мог бы запускать такую симуляцию. Здесь работает антропный отбор и соображение о вычислительной и смысловой эффективности. Симулировать полностью чужеродную форму разума с принципиально иной структурой восприятия и когнитивных ограничений — задача куда более сложная и менее информативная. Если цель — изучить эволюцию сознания, социальные динамики или понять существ, подобных самим симуляторам, логичнее воспроизводить близкие по устройству системы. Мы сами, строя модели, обычно начинаем с того, что понятно, что перед глазами.
Мир, который мы наблюдаем, тонко настроен под существование сложных информационных структур и наблюдателей. Если симуляция создаётся существами, заинтересованными именно в таких наблюдателях, их собственная когнитивная архитектура, скорее всего, опирается на сходные принципы: ограниченный доступ к информации, необходимость моделировать себя и окружение, способность к абстракции. Из этого не следует, что они выглядят как мы биологически — субстрат может быть любым. Но функционально, на уровне способов обработки информации и переживания, они ближе к нам, чем к произвольным «чужим». Иначе симуляция теряет смысл как инструмент самопознания.
Физика даёт почву для размышлений: если пространство-время дискретно на планковском масштабе, а информация фундаментальна (идея Уилера — «it from bit»), вычислительная природа реальности не выглядит абсолютно чужеродной. Экспериментальных доказательств симуляции пока нет, и изнутри их, вероятно, не получить, если симуляция достаточно совершенна. Но и окончательно опровергнуть гипотезу нельзя. Важнее другое: даже если мы симулированы, боль, которую ты чувствуешь, когда ударяешься, и смысл, который находишь в разговоре или в понимании чего-то нового, остаются твоими. А те, кто мог бы нас создать, скорее всего, решали похожие задачи — как понять себя через создание похожих на себя существ.
Гипотеза не обесценивает опыт. Она предлагает, что наш опыт может быть реализован на более глубоком уровне вычислений, чем мы привыкли считать. И это само по себе не делает его менее настоящи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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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게, 가리발디는 보불전쟁 이후 성립된 프랑스 제 3공화국 국민의회에서 프랑스 국회의원으로 선출됨. 물론, 곧 사임하긴 함. 또 당시 프랑스 선거 환경이 지금과 달랐기도 함. 또 의외로 프랑스 혁명 때부터 외국인이 선출직하는 경우가 프랑스엔 많았고. 그러니까, 가리발디는 코뮌을 진압하는 티에르 정부의 출범에 잠시 참여했던 것.
근데, 이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성립된 프랑스 제 3공화국 의회에는 “전통주의자”로 분류되는 왕정복고파가 다수 당선됨. 여기서 왕정복고는 나폴레옹 어게인!이 아니라 부르봉 어게인!임.(아, 물론 나폴레옹 어게인!인 보나파티스트들도 소수 있음)
사실 그들이 머릿수로만 따지면 부르봉 어게인!이 의회 과반인데, 또 이 프랑스 혁명 동안 부르봉이 두 파로 분열되는 바람에 협력이 안됨. 가까스로 공화파가 연정으로 정권 유지. 근데 여기서 연정에 동원되는게, 왕정복고파 중에서 혁명에 긍정적이었던 오를레앙파였음. 그러니까, “왕당파”가 공화국 헌법수호에 적극적이었다는 거. 사실 또 여기에 지배 연합에서 배제된 “원조 부르봉”도 헌법적 지배를 받아 들이고 계속 국회에 참여하고.
그리고 그 와중, 이 “공화파 연정(근데 실세는 또 부르봉 어게인!인)”이 빨갱이들이라고 규정한 파리코뮌을 때려잡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자신들을 보불전쟁에서 패배시킨 프러시아군의 협력도 구함. 이런 가운데, 파리코뮌은 저 프랑스 의회 국회의원도 잠깐 했던 가리발디에게 자신들의 군대 지휘자가 될 것을 요청함! 그리고 이 요청에 대해 가리발디는 감사를 표하고, 코뮌의 “진보적” 대의에도 상당부분 공감한다는 의견을 표했으나 군대 지휘자가 될 것은 끝끝내 거부. 그리고 이후 코뮌에서 학살이 벌어진 것을 애도하기도 함.
진짜 이 이태리 통일-보불전쟁-독일 통일 모먼트에선 어지럽게 돌아가는, 단순히 좌/우라고 할 수 없는 전진하는 근대와 그것에 대응하는 인간집단들의 모먼트가 난무하는 것.
그리고 요즘 스터디에서 이태리 전간기 하시는 분 말을 많이 들어서 더 그 연결이 강화되었는데, 19세기 공화주의 혁명 모먼트의 지도자들은 의외로 전통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거나 스스로가 전통주의자임.
이 사례로 비스마르크가 종종 제시되고, 사실 그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3세도 그런 맥락이 있음. 근데 요즘 더 관심이 가는 것이 가리발디.
스스로는 공화주의자였는데, 이태리 통일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의 우선성을 냉정히 판단하여 사보이 국왕 엠마누엘레와 카보우르에게 협력.
혁명 참여 와중에 이태리 군주들과 지방정부들의 견제를 받아 십 년 넘게 망명 생활을 하는데, 이 때 남미, 특히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공화주의 혁명(내전)에 참전함. 사실 우루과이 헌법에는 아예 지대한 영향을 미침. 그리고 이렇게 성공을 맛본 뒤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서 통일전쟁을 지휘. 그래서 붙는 별명이 “두 세계의 영웅”.
흥미로운 건, 이 가리발디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것. 사실 그가 남미에서 망명생활할 때 저 프리메이슨 롯지를 전전하며 생활함. 그리고 이태리 통일 이후엔 이태리 프리메이슨 최고직인 그랜드 마스터를 역임함.(이 때 베네치아 합병 문제로 완전한 통일은 아니긴 했음.)
근데, 말년에는 이태리 통일 의회 의원직을 수행하는데, 이 때 또 사회주의(막시즘과는 다른 종류의, 마르크스 이전 사회주의. 마르크스가 공상적이라고 비난했던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 조류들)에 긍정적 의견을 표하고 그들과 연대할 것을 요청. 사실 그는 줄곧 생시몽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음. 당연히 생산수단의 국가/노동자의 소유는 반대했지만,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진보적 “좌파“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음.
그는 파리코뮌이 발생했을 때도 살아 있었고, 파리코뮌이 발생하는 배경인 보불전쟁 때에도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는데, 파리코뮌을 박살내고 프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학살을 진행한 프랑스 정규군 소속이었지만(그는 파리에는 참여하진 않음. 파리코뮌 당시에는 그가 속했던 외국인 용병대는 해산한 상태), 파리코뮌에 동정적이었고, 아예 제 1인터네셔널은 지지함.
사실 가리발디는 굳이굳이 프레이밍하자면 전통적 군주제와 타협할 수 있는 혁명적 공화주의자에 가깝고, 이 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 좌파(당연히 용법은 20세기와 다름)“로 정의. 사실 오히려 그는 저 전통주의자의 “근대적 성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
그리고 요즘 스터디에서 이태리 전간기 하시는 분 말을 많이 들어서 더 그 연결이 강화되었는데, 19세기 공화주의 혁명 모먼트의 지도자들은 의외로 전통주의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거나 스스로가 전통주의자임.
이 사례로 비스마르크가 종종 제시되고, 사실 그에게 패배한 나폴레옹 3세도 그런 맥락이 있음. 근데 요즘 더 관심이 가는 것이 가리발디.
스스로는 공화주의자였는데, 이태리 통일과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의 우선성을 냉정히 판단하여 사보이 국왕 엠마누엘레와 카보우르에게 협력.
혁명 참여 와중에 이태리 군주들과 지방정부들의 견제를 받아 십 년 넘게 망명 생활을 하는데, 이 때 남미, 특히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공화주의 혁명(내전)에 참전함. 사실 우루과이 헌법에는 아예 지대한 영향을 미침. 그리고 이렇게 성공을 맛본 뒤 다시 이태리로 돌아와서 통일전쟁을 지휘. 그래서 붙는 별명이 “두 세계의 영웅”.
흥미로운 건, 이 가리발디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것. 사실 그가 남미에서 망명생활할 때 저 프리메이슨 롯지를 전전하며 생활함. 그리고 이태리 통일 이후엔 이태리 프리메이슨 최고직인 그랜드 마스터를 역임함.(이 때 베네치아 합병 문제로 완전한 통일은 아니긴 했음.)
근데, 말년에는 이태리 통일 의회 의원직을 수행하는데, 이 때 또 사회주의(막시즘과는 다른 종류의, 마르크스 이전 사회주의. 마르크스가 공상적이라고 비난했던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 조류들)에 긍정적 의견을 표하고 그들과 연대할 것을 요청. 사실 그는 줄곧 생시몽주의자들과 어울리기도 했음. 당연히 생산수단의 국가/노동자의 소유는 반대했지만, 공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진보적 “좌파“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음.
그는 파리코뮌이 발생했을 때도 살아 있었고, 파리코뮌이 발생하는 배경인 보불전쟁 때에도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는데, 파리코뮌을 박살내고 프러시아군의 도움으로 학살을 진행한 프랑스 정규군 소속이었지만(그는 파리에는 참여하진 않음. 파리코뮌 당시에는 그가 속했던 외국인 용병대는 해산한 상태), 파리코뮌에 동정적이었고, 아예 제 1인터네셔널은 지지함.
사실 가리발디는 굳이굳이 프레이밍하자면 전통적 군주제와 타협할 수 있는 혁명적 공화주의자에 가깝고, 이 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 좌파(당연히 용법은 20세기와 다름)“로 정의. 사실 오히려 그는 저 전통주의자의 “근대적 성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
결국 18-19세기, 혹은 “장기 19세기”의 정신적 투쟁의 골격은 전통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임.
홉스봄식으로는 이중혁명(정치적 혁명, 산업혁명)의 진행 속에, 인간 사회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로 갈등함.
여기서 중세-얼리모던으로부터 기원하는 status quo를 지킨다는 선택지는 전통주의, 그리고 그것과 투쟁하며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것이 자유주의/사회주의. 그런데 이 와중 전통주의는 절대로 “중세적”이지 않음. 오히려 그 혁명들의 위험과 그 대응을 누구보다 잘 감지한다는 지점에서 오히려 근대적이기도 함.
그리소 자유주의/사회주의는 저 진보의 주체는 누구인가, 진보의 완성조건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로 갈림. 사실 그들은 전통주의자보다는 비교적 단선적인 진보를 긍정하기 때문에, 각 사회의 “발전수준”에 따라 언제든 연합할 수 있음.
사실 마르크스도 공화주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우선한다는 지점을 계속 얘기하고, 이것은 마르크스가 이미 “관찰”한 것이라 당연한 것인데, 력사적으로도 공화주의 혁명 모먼트들이 19세기를 지배했음.
근데, 앞서 말했듯, 전통주의자 역시 근대의 산물인 동시에, 저 구분이 상황, 지역에 따라 다르고 이합집산함. 앞에서 마르크스 인용했지만, 사실 난 마르크스 해석자들 중에 부르주아지 혁명->프롤레티아 혁명, 그리고 그 과정 중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식으로 말하는 이들을 별로 신뢰 안함. 사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그런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지진 않았고 그 “발전단계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투쟁함. 사실 한국에서 너무 당연하게 유통되는 그 서사는 진짜 “주변부”적 이해라고 생각. 그리고 그 깔끔한 도식에는 언제나 괴상한 전통주의자들이 찐빠를 놓는다고 생각.
황모🐋HwangMo retweeted
말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듣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 하나는 생각의 정리가 끝났다는 것.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 뭘 모르는지 알고 있다는 것. 정보의 가치는 더할 때가 아니라 뺄수록 증가한다.











